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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웅 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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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연구 댓글 5건 조회 1,579회 작성일 17-08-22 21:15

본문

성균진사 오웅 지석은 사망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구한말정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근대의  행정구역 단위인  오지리등이 있습니다.

댓글목록

예천님의 댓글

예천 작성일

저는  본 홈피 관리자 입니다.
귀하께서 이곳에 오웅지석에 괸한  글을 올리셨는데 대단히 유감입니다.
이는 해주오씨 뿌리에 관한 역사이기에 명확한 증거자료 없이 설로만 말씀하면 안됩니다.
하여  첫째  명확한 연구 자료를 올리실 것과  실명을 밝히십시오.
비록 옳다 할지라도 익명으로 올리면 누가 믿겠습니까?
부탁 올립니다.
근거가 명확치 않으시면 이 글은 삭제하오니 이해바랍니다.

오과객님의 댓글

오과객 작성일

먼저 연구님이 오웅 지석에 관심을 갖고 글 올려주신점 감사드립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오웅 지석은 당시 에 제작된거 맞습니다
 
행정구역이 오지리(마을)이 근대지명이라 하였는데
언제지 모르지만 조선시대 행정 지명이 맞습니다.

곡성현지명이 1895년에 곡성군으로되멌고
군-면 -리- 마을 체계가 1914년에  완성 되어 오늘까지 사용됩니다

오기라가 조선시대 마을 이었다는것을 확인할수있는 방법은
호구총구 호구단자, 곡성현 호적대장 등이 있은데

한가지 고증 자료만 찾아보겠습니다
1756년 곡현현 오기리 호적 대장이 남아있으니
근대 행정구역이기에 근대에 오웅지석이 만들어졌다는것은
100% 잘못된 판단입니다

곡성현호적대장: [谷城縣戶籍臺帳 ]

제작시기 : 1756년
권수·책수 : 1책 151매
소장처 : 고려대학교박물관

정의
1756년(영조 32, 丙子式)에 조사, 작성된 전라도 곡성현(지금의 전라남도 곡성군)의 호적 중 도상(道上)·예산(曳山)·오기(梧技) 등 3개 면의 호적을 정서하여 묶은 책.

내용
1책 151매. 필사본. 고려대학교박물관에 유일하게 전한다.

책 끝에 현 전체의 호구 총수와 색목(色目: 직역별 인구수)이 기재되어 있고, 또 호구성적(戶口成籍)을 담당한 차지도감(次知都監)과 색리(色吏)의 직역·성명이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같은 호적대장 중의 마지막 책인 것으로 여겨진다. 끝에는 곡성현감과 전라도관찰사의 서명·수결(手決)이 있다.

예천님의 댓글

예천 작성일

과객님의  자료  대단히 고맙습니다.
위 연구님이 글을 쓰신 의도가  지석 제작 시기가 문제가 아니고 뿌리 근간을 왜곡  혼동케 함이 아니신지 제 소견에 그리 생각되에  명확한  근거를 요구했습니다.
이쯤이면 혼돈의 여지가 없으리라  믿어 위 글은 삭제없이 그대로 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무국장  드림

연구님의 댓글

연구 작성일

1. 지석은 사망당시에 매장할 수도 있고 사망이후도 매장할 수도 있습니다. 성균진사 오웅 지석의 내용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지석의 형식, 기술내용(오지리인, 중추부사 겸 오위장 첨지 : 중추부사와 첨지는 같은 말)등등에 비추어 보면 오웅 사망당시에 매장된 것으로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있다는 말씀입니다.
2. 아울러 지석에 사망당시에 제작되었다는 년호도 없습니다.
3. 문화류씨 가정보(1562년 간)에 보면 귀문의 오맹상(처부 영월신씨 신보동), 오계상(처부 천녕유씨 유찬)이 기록되어져 있는데 그 이유는 두분의 처가가  그 선대에 문화류씨 외/외손등과 혈연지간이라 문화류씨 가정보에도 등재되어 있습니다.
4. 성균진사 오웅 지석에도 외조부가 유찬이라고 하고 있으므로 문화류씨 가정보 기록과 일치합니다.

오과객님의 댓글

오과객 작성일

굳이 논의 하고싶지 않으나 댓글 달지 않으면 오해할수 있을것 같아
댓글 달겠습니다

묘지석에 매장 시기에 관하여
지석 내용을 보면 장례 기간이 3개월이었기에
시간적으로도 충분하며 당시에 매장했다고 100% 보는 이유가 있습니다

백자묘지명은 그리 정성을 들여 제작한 묘지명이 아닙니다
형식을 갗추어 글을 받아서 제작한게 아니라
집안에 작성하여 대략적인 형식만 갖춘 것으로 보여지며,
모든 묘지석에 내용이 6하 원칙에 의해 쓰지는 않습니다.

묘지명에 오웅은 1505년 ~졸년 계미(癸未) 1583년이 되며  無子라
 웅의 동생인 虎의 첫째 아들인 선계를 입양하였고
선계는 1남(오함) 2녀라 했는데,  불행히도 후손이 여기서 절손되었습니다.

선계의 서랑공 한씨가 있어 양자는 들이지 않은것으로 보이며
당시의 혼인제도가 남귀여가혼 시대이며 사위도 처가집에 제사를 봉사하던 시대였는데  혼란한 시대가 도래하여  임진왜란 이후 예법에 관습이 남자위주로 바뀌어 한씨의 후손들이 시간이 흐른뒤  자연스럽게 잊혀진 묘가 되어 되었으며 이는 시대적 상황이라 생각됩니다. 

유찬에 관직에 관하여 순서에 문제로 달리보는듯한데
2017년 현제의 관직 이름도 자주바뀌잖아요.
전 400 전 관직에 변화 잘 모릅니다 
그리고 이런 관직 변화에 대하여 깊게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오웅에 후손은 손자인 오함에서 절손되었고
묘는 봉분도 없어져 묘지인지도 모르고
10~20 여년전에 농지로 개간되는 과정에 나온 묘지석입니다 
 
오래전 이 묘지명 이야기를 듣고
궁금하여 사진을 받아보고 해석해보니
우리 종중에 소중한 유물이었습니다.

님이 뭘 연구하고자 하는지 모르나
우리에게 아주 소중한 유물이고
우리에겐 역린같은 부분을
근거 부족한 관직, 지명, 묘지명 형식으로 후대에 제작되었다고 보는 것은 타 종중에 소중한 부분을 너무 쉽게 접근하는듯 보여 안타갑습니다.

저도 他 姓 宗中에 글올릴 경우가 있는데
정말 조심스럽게 글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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