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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진사 오웅등의 각종 문헌 기록

페이지 정보

작성자 연구 댓글 11건 조회 1,660회 작성일 17-09-01 12:23

본문

성균진사 오웅(1505-1583)등의 문헌 기록

1. 미암집(미암일기, 유희춘 1513-1577)

(1) 보물 제260호 미암선생일기 제1(眉巖先生日記 第一冊)

全羅監司 聞余新拜應敎 專伻書問來 支應監官趙汲來 是日之發來 冒犯大風 初三日 晴而無風 食後與榮春·梁汀等叙別而行 紅日照白雪 甚可觀也 過本土倉 見申正字大壽仁老 持酒果出待于路左 余下馬而飮 吟贈小詩曰 二十年前舊 三千里外來 一盃相屬處 紅日照江臺 行至龍溪根村 見谷城縣監朴思愚仲敏 以支供出待 余欲相見 同年進士吳熊益佐·四寸同壻吳鯨 亦出相見 喜甚 日將暮 至老多院 見景陽察訪 送驛馬 食玉果茶噉 日將昏 入玉果 主宰 宋應瑞文老 乃李習之之妹夫也 談話酬酢 生員許繼·學生·薛璣來訪

(2) 보물 제260호 미암선생일기 제8(眉巖先生日記 第八冊)

二十七日 晴 閱一所三所榜 則玉果宰吳謜·李仲久·柳公潛之子及李洁 皆中矣 谷城進士吳熊·吳虎 送乾柹一貼各來焉

(3) 보물 제260호 미암선생일기 제10(眉巖先生日記 第十冊)

谷城吳熊虎兄弟 各送

(4) 보물 제260호 미암선생일기 제11(眉巖先生日記 第十一冊)

十七日 晴早 朝府使李公仲虎 以支待監司馳來 余出見于斜廊 辰時 監司崔公應龍 自玉果來訪 先入依幕 余先遣宋震問安 聞監司著紗帽 余降階相見 遂相揖而升階 坐于大廳作房之地 相對設茶啖 監司先行酒 潭㑑及假都事南原教官 谷城同年進士吳熊益佐 相繼行酒 監司命宋震光先 坐於席末 余乃行酒 以家辨果床爲禮 崔公見余所修大學䆁疏 深加嘆伏 午對飯 興文亦出謁 而監司命坐余側 余招監司軍官丁龜壽來 飮之酒 未時 監司乃去

聞長興進士魏德義 娶于寶城 誣毁寶城宰任子雲 以吹角起軍 幾圍聖殿 請永廢 檄書 一今據證定罪徒邊云 余以吳熊益佐 乃乙未同居都會 丁酉同年而相好 見之深喜 以筆墨各一箇胡椒一封爲贈

2. 1755(영조 31) 谷城郡에서 작성한 司馬案

진사 오숙상 서경 신유방(1501) 본 해주

진사 오웅 익좌 정유방(1537) 본 해주 숙상지삼촌질

3. 보물 제1464호 사마방목(司馬榜目) 방목(榜目)

성균 진사 오웅의 숙부 오숙상에 대한 기록

     幼學吴叔祥瑞卿 本 居 父進士 克綏

 4. 기타 문화류씨 가정보(1562년 간)

 오웅의 오계상 및 배위 부친 유찬(천녕유씨)

 오웅의 叔父 오맹상 및 배위 부친 신보동(영월신씨) , 그리고 사위 김한종, 자녀 오익, 오진



댓글목록

연구님의 댓글

연구 작성일

1. 제가 아래에 쓴 성균진사 오웅 지석문제는 성균진사 오웅을 장례할때 지석을 매장하였는냐 아니면 그 이후에 매장하였는냐하는 논점이 있었지 지석문의 내용에 대하여 문제 삼은 것이 아니므로 오해 없으셨으면 합니다.
2. 귀 문에서도 그 귀문의 선조이신 성균진사 오웅이 미암 유희춘과 상당한 교류를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예천님의 댓글

예천 작성일

1.연구 귀하께서 지석 매장 시기를  논쟁한 이유를 밝히라 했거늘 동문서답하시니 더욱 유감입니다.
누가  질문을 했나요? 아님 귀하의 해박한 박식을 무시했나요? 출토  시기가 중요함이 아니고 우리  선조는 휘종인 할아버지요 그 위는 현보님이  해주오씨 시조이심을 자랑스러워하는 후손인봐 이를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그 어떤 의도가 있었다면 불쾌하기 짝이 없는바 귀하
의 진정한 의도를 정중히 묻는바 입니다

일곡님의 댓글

일곡 작성일

귀문의 미암 유희춘 선조님과 우리 오웅 선조님과 상당한교류가
있었던 걸로 보여집니다
귀힌 자료 주시어 고맙습니다 많은 참고가 되겠습니다

연구님의 댓글

연구 작성일

1. 한국고전db에 유희춘의 미암집에 있는 미암일기 국문 번역본이 있는데 미암일기 부분은 축약을 해서 올린 것이라 귀문의 선조이신 오웅등의 관련 기사는 국문 번역본에 없습니다.
2. 유희춘의 미암일기에 있는 귀 문의 오웅등 관련 기사는 제가 국가기록유산 싸이트에 있는 한문 원문을 올린 것으로 시중에 유희춘의 미암일기 국역 완역본이 있으므로 이를 참고하시면 되실 것입니다.
3. 그리고 저는 해주오씨도 아닌 타성씨로 귀문의 시조님 및 해주오씨를 폄할려고 이글을 쓴 것이 아님을 거듭 밝힙니다.
4. 저는 항상 족보는 그 무엇보다는 진실되고 정직하여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여러가지 문헌, 정보, 소통등의 부족에서 만들어진 과거에 족보는 한편에서 보면 문제점등이 많습니다. 근래에는 고려사,조선왕조실록, 고려시대등 각종 지석등을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정보화 사회가 되어 근래에 들어 올바른 씨족사를 정립하고자 하는 가문도 많습니다.

오과객님의 댓글

오과객 작성일

연구님이 자료수집하시고 연구하여 주신 자료와 정성
저도 연구자에 입장에서 고맙게 생각합나다.

젊은날 저도 씨족원류와 성화보를 돋보기로 몇번씩 읽으며 吳자만 나오면 무조건 체크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사소한 오해가 있었으나
이제 모두 풀린듯 합니다
연구님께 감사드립니다

오과객님의 댓글의 댓글

오과객 작성일

2. 1755년(영조 31) 谷城郡에서 작성한 司馬案
○ 진사 오숙상 서경 신유방(1501년) 본 해주
○ 진사 오웅 익좌 정유방(1537년) 본 해주 숙상지삼촌질

위 자료는 같은 자료인지 몰라도
제가 발굴하여 현제는 아는  종친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입다.

당시 곡성에사 과거 준비하던 교욱 기관 내력을 기록한 필사본이며
곡성에서 급제한 명단이기도 합니다 

연구님의 댓글

연구 작성일

1. 1755년 사마안은 동일한 자료입니다. 나머지는 제가 발굴(?)한 자료입니다.
2. 저는 우리나라 족보가 올바른 씨족사를 정립할려면 기본적으로 중국에서 동래했다는 설과 같은 성씨이면 대개가 시조가 같다는 관념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씨족의 관념 및 족보에 관념은 인류 역사에 비추어 보면 그 오래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족보의 관념에는 고려초부터이고 그것이 실제 정착된 것은 조선초기부터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4. 지금까지 발견된 수백개의 지석중에 오씨 관련 지석도 몇 개 있습니다. 오씨 시조가 중국에서 동래했다는  말도 없으며 오연총 같은 경우에도 고려사를 보면 아들이 없다고 나옵니다.(그렇다고 고려사 기록이 다 맞는 말은 아닙니다).
5. 아무쪼록 귀문의 발전을 기원합니다.

연구님의 댓글

연구 작성일

이규보(1168-1241)의 동국이상국집에 나오는 오주경(吳柱卿)이라는 인물이 귀문의 선조와 동일한 분이지도 모르겠습니다.
 
* 동국시상국집 "옥당(玉堂) 손득지(孫得之), 사관(史館) 이윤보(李允甫), 사관 왕숭(王崇), 내한(內翰) 김철(金轍), 사관 오주경(吳柱卿)이 화답시(和答詩)를 보내왔기에 다시 운을 따라 화답하다 "

오과객님의 댓글

오과객 작성일

먼저 사마재안은 제가 발굴한 곡성현에서 작성한 곡성현 출신으로 급제자를 기록한 초고본입니다

중국 동래설에 관하여는 전혀 무관하다고 볼수없습니다
최근 김해김씨의 상계가 김일제의 과거가 밝혀지고 있지만 종친회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울것입니다, 또 사신이나 중국내 정치 혼란으로 동래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성의 경우 발해가 망해서 고려에 입국한 오흥이 있는데 저는 그 후손들을 조금은 추정은 하나 이걸 밝히면 몽둥이 침질 당할겁니다.

조선초기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식으로 사성을 받은 해주오씨도 있습니다.
그 후손들이 해주오씨 관향을 쓰지 않고 다른 해주오씨에 투탁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 또한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근래에 어느 오씨는 저희 시조와 다른른 해주오씨와 합보를 하였는데
웃기는게 자기네 조상님이 더 먼저인데 그것을 모르니 연구자가 없으니
안타까워 몇 번 정보를 줘 봤지만 전혀 이해를 못하기에 그냥 포기 하였습니다
그분들이 모르고 또 기존 관념을 바꾸길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족보가 체계적으로 확립도 조선초기이후이나 이는 어디까지 현존 유물로 보는 관점이고 고려시대에는 가록으로 전해져 내려왔을 것이나  국내 정치 혼란으로 전쟁이나 홍수 역모죄인등으로 온전하게 내려올수 없었을 것입니다. 왕조가 바뀌면 얼마나 혼돈에 시대인지 아실것닙니다
   
오연총에 관하여는 저희 족보도 무자이니 괜찮습니다.

제가 타 성은 잘모르지만
오성인경우 신라 지증왕떄로 올라가는데 그냥 내려온것으로 생각할뿐입니다

일부는 허구라 말할수도 있으나 일본 815년에 쓰여진 신찬성씨록을 보면
삼국시대에도 오성이 있었으며 백제에서 일본에 정착한 분도 있으니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우리도 일본처럼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 체계적인 성씨록이 내려왔다면 지금처럼 족보가 혼란스럽지는 않았을뗀데 이를 아쉽게 생각합니다
알수 없는 해결할수없는 문제는 그냥 거기까지만 믿습니다.

동국이상국집에 나오는 오주경에 관하여는 한자가 같은 관직도 비슷한 분이 저희 족보에 기록된 분이 계셔서 저희 선조님일것이라 추정합니다.

연구님
감사합니다

연구님의 댓글

연구 작성일

유희춘(1513-1577)의 미암일기를 보면 귀 문의 선조이신 오웅(자, 익좌 1505-1583)과 관련 기록이 더 있어서 올립니다. 유희춘과 귀문의 오웅 선조님과 인연을 보니 1537년 정유년 식년시에 유희춘은 생원시에 귀문의 선조 오웅은 진사시에 합격한 동방 합격자입니다. 또한 지역적으로 유희춘과 오웅은 가깝운 지역사람이라 서로 왕래하고 지냈던 것 같습니다.

六月 二十九日
 
○ 吳益佐 自禺中來會樓上 和余小詩甚佳

六月 二十七日

○ 延見縣監申承緖 廉平向正人也 登小樓 與吳益佐 對飯談話 昨日 多所救恤 吳感喜而去 ○南原南村崔尙重及柳增來謁 余皆有所贈 ○昨 因鄭伯裕 聞和順曹閎中之賢 父歿而訓養三弟 有 古人之風 昨 因吳益佐 又聞谷城安光業 一鄕皆稱善士 於和順通關以詢之

正月初八日

○吳鯨瀛老來告歸 修答吳益佐書

八月 二十四日
 
○晴 早朝發行 行三十餘里 巳時 到順天深隱院 食順天點心 見府使李選 將出 設席東向祖贈承旨公墓 再拜而行 榮春別歸順天 光雯則隨行 未申間 到潺水院遞馬 食求禮茶啖遂行 申酉間 入求禮 谷城吳益佐來訪 對茶啖

八月 二十五日

○吳益佐·朴億齡·閔 ·梁貴鶴 相繼來去

예천님의 댓글

예천 작성일

귀한자료 감사합니다.
소생이 이전 글에 유감을 표한바는 다른 회원동정게시판에 그 배경을 올렸습니다.
그간 애정으로 오문을 사랑하여 주신데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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