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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재선생묘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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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규봉 댓글 0건 조회 3,382회 작성일 15-08-13 07:33

본문

16세기 남원지역의 유학은 기묘명헌인 안처순, 이조판서 노진, 왜란때 의병장 변사정 등으로 이어지며 영호남간의 학문교류가 이루어지고 경세와 실천을 중시하는 유학의 기풍이 성행하였다. 변사정은 영남의 조식 등, 호남의 김천일 등, 광주 기대승 등, 남원의 정염,양대박,오수성(복재선생)등과 교유하였다. 고룡서원은 선조 12(1579)에 노진을 제향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가 창주서원으로 사액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남대학교 김봉곤 교수의 -조선전기 남원지역의 유학사상-에서 발췌>

이처럼 복재(오수성:1529-1584)선생은 성리학에 조예(造詣)가 깊어 당대의 영호남 학문의 대가들과 교류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선생의 문하에서 과거에 급제하는 등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으니 선생의 맏아들인 해서(海西:오정길)선생도 그 중의 한분이다. 이처럼 학덕{學德}을 실천하여 고룡서원에 배향하려다 국난으로 인하여 미수(未遂)에 그쳤으니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서원에 제향될 정도의 높은 학문과 공경의 덕을 갖춘 분임을 알 수 있다.

선생의 묘갈명을 쓴 송사(松沙)기우만(1846-1916)은 전남 화순 명문(名門) 출신으로 문유(文儒)로 추앙받았으며 조선말기의 의병장이고 독립운동가이다.

 

복재선생묘갈명  

행주 기우만 송사  

서경의 자진(함순咸淳:고려후기의 절의와 문장가)과 같은 공명(功名)을 기뻐할 것인가? 동경의 숙도(이칙李則:조선전기의 선견과 직언의 사표가 됨)와 같은 표방(標榜)을 숭상할 것인가? 자진과 숙도의 공명과 표방을 겸하여 건넘으로써 학문의 참된 지식과 실천이 완연(完然)하니 은덕의 으뜸이 되어 백세토록 높이 우러러볼 바이다.

복재선생 오공은 거의 타고난 기품이 도에 근접하고, 뜻과 기백이 청명하여, 의지가 훌륭하니 능히 효도하고 우애함에는 지식과 실행이 윤익(輪翼)한 듯하였다. 거가(居家)에는 모습이 장엄하고 사람을 대할 때에는 온화하고 후덕하니 나이가 많지 않음에도 덕은 이미 아름다웠다. 자리에 부름이 자주함으로 임하(林下)의 뜻을 얻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으니 이른 바 밝은 세상의 일민(逸民: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이 있으면서도 세상(世上)에 나서지 아니 하고 민간(民間)에 파묻혀 지내는 사람)이었던가? 더구나 다스려 기록한 것에 드러난 바의 심성(心性)과 이기(理氣)의 정미함은 거의 정자와 주자에 함께하고 논한 바는 차이가 있지 않으니 그가 쌓은 바를 거슬러 살펴보려 하되 어찌 감당하여 헤아려 볼 수 있겠는가?

자기에게 얻어진 것이 있으면 그 것을 남에게 미치게 하니 남명(曺植조식:조선 중기 학자로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음)을 사숙(私淑:직접(直接) 가르침을 받지는 않았으나 마음속으로 그 사람을 본받아서 도()나 학문(學文)을 배우거나 따름)하여 받은 바를 바로 거느려 가르침에 임하니 류월파(류팽로柳彭老: 곡성 옥과 사람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高敬命) 등과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금산전투에서 전사함)와 장사촌(장경세張經世:조선중기 남원사람 1589(선조 2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함)이 그 문하에서 출현하였다. 월파가 이르기를 선생은 성격이 침잠(沈潛)하고 순수하니 풍채가 매우 아름답고 신령스러운 귀감이다 하였고, 이활계(이대유李大:호남湖南의 은군자隱君子)는 이르기를 성격이 온화하고 언행이 조화로우니 깊은 땅속에 감추어진 옥이라 하였으며, 정만헌(정염丁焰:전북 장수인으로 광주목사를 지냄)은 성격이 온아하고 공신(恭信)하며 마음을 편안히 하되 과묵하다 하였다. 선생은 대개 세상에 아부하기를 좋아함이 없고 지덕(知德)을 다한 자니 이로써 미루어 생각건대 완전한 덕을 마침내 드러냈으니 백세의 뒤에 까지 교화(敎化)가 미치어 흥기할 것이다. 옛적 임진(1592)년 봄에 고룡서원에 배향하고자하는 논의가 있어서 이미 예를 갖추어 정하였으나 국난으로 인하여 이루어지지 못했다.

선생의 휘는 수성이고 자는 복초이며 호는 복재로 해주오이다. 상조는 금자광록대부 종인이며, 중조는 삼사좌윤 영이며, 현감 용려는 남원에 은둔하신 분으로 그의 고조이며, 이조참판 극제와 참봉 구정은 증조 및 조부이고, 아버지는 경인으로 참봉 대사헌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경주김씨로 외조부는 별제 익기공이다. 선생은 가정 기축(1529)년에 태어나 만력 갑신(1584)년에 졸하였고, 묘는 남원 수지방 북향산에 있으니 묘좌이고 배우자는 순흥안씨 교위 두의 따님으로 합봉하였다. 사자(嗣子) 정길은 사마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에 재직하였으며 효우덕행(孝友德行)으로 몸소 아버지가 즐거워함을 다하며 인륜이 성하기를 중시하였으며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수()를 마치니 선조임금이 사액(賜額)하여 노봉서원에 제향되었다. 차자 정직, 차자 정익, 차자 정식은 참봉으로 도의(道義)로 이름이 드러났으며 장손 상빈은 통덕랑이고, 정익의 아들 원빈과 익빈은 도사이고, 정식의 아들은 국빈이며, 장증손 윤적은 문장과 행실이 다 넉넉하였고 다음 윤명은 정한강(정구鄭逑:조선 중기 문신 겸 학자로서, 경학을 비롯하여 산수부터 풍수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고 특히 예학에 밝았으며 당대의 명문장가) 문하에 유학하여 이학(理學)에 심오하였으며, 윤적의 아들 시해는 수신제가하여 고을의 칭찬을 받았고, 윤명의 아들 정해는 식견과 취미가 고원하였고, 다음 진해는 이갈암(이현일李玄逸: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영남학파의 거두)의 문하에서 종사(從師)하는 등 모두가 가풍을 이으니 학원(學菀)으로 이름난 집안이 되었다.

묘역에 현각(비문)이 없으니 장차 비석에 표기하려고 후손 병선(선생의 9세손)과 동원(선생의 11세손)이 비문을 위하여 나를 부르니 지난날부터 친한 사이라 감히 사양하지 못하였다. 새김에 이르노니 낡은 도포는 패옥보다 화려하고 마시는 물은 정승의 솥물보다 맛있다. 오직 덕이 있는 자라야 할 수 있거늘 이로써 백세토록 높이 우러러볼 것이니 가칙(柯則:도끼자루 법칙이란 뜻으로 진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실천 속에 있음을 뜻함)을 잡아두고 기록 보존하여 마땅히 영구히 전해져야 할 것이다. <원문은 세덕록 124쪽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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